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악의 평범성 (문단 편집) == 내용 == >그의 마지막 말의 기괴한 어리석음보다도 이 점을 더 납득이 가게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는 자기가 기독교인이 아니며 죽음 이후의 삶을 믿지 않는다는 점을 일반적인 나치스 식으로 표현하기 위해 '신을 믿는 자'[* '신을 믿는 자'(Gottgläubiger)는 신을 믿지만 기독교와 결별한 사람을 지칭하는 나치스의 관용어이다.]라고 힘주어 말하면서 진술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그는 계속해서 "잠시 후면, 여러분,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이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장례 연설에서나 사용되는 상투어를 찾아냈다. 교수대 아래에서 그의 기억은 그에게 마지막 속임수를 부렸던 것이다. 그는 '의기양양'해져서 이것이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사악함에 대한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마치 저 마지막 순간에 그가 요약하고 있는 듯 했다. 무시무시한 교훈, 즉 말과 사고를 불가능하게 하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Nothing could have demonstrated this more convincingly than the grotesque silliness of his last words. He began by stating emphatically that he was a Gottgläubiger, to express in common Nazi fashion that he was no Christian and did not believe in life after death. He then proceeded: "After a short while, gentlemen, we shall all meet again. Such is the fate of all men. Long live Germany, long live Argentina, long live Austria. I shall not forget them." In the face of death, he had found the cliché used in funeral oratory. Under the gallows, his memory played him the last trick; he was "elated" and he forgot that this was his own funeral. It was as though in those last minutes he was summing up the lesson that this long course in human wickedness had taught us - the lesson of the fearsome, word-and-thought-defying banality of evil. (Hannah Arendt, ''Eichmann in Jerusalem'')] [[아돌프 아이히만|아이히만]]은 당시 유대인 6백만명을 학살하는 데 결정적인 관여를 한 나치 실무자였지만, 훗날 법정에서 자신은 그저 명령받은 대로 행동했기 때문에, 도의상 잘못은 했으나 법적으로는 무죄라고 항변했다.[* 아이히만은 죄책감을 느꼈었고 자신이 잘못을 했다는 것도 인정했지만, 법만으로 따진다면 자신의 행동은 무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신은 (나치의) 법에 따라서 행동했을 뿐이고 법을 수행하는 것은 공무원의 당연한 의무이라는 논리였다.] 그러나 아렌트가 보기에 아이히만은 나치의 명령이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모르는 듯 보였다. 아이히만은 종종 현실을 파악하지 못했고, 더 나아가 현실을 마주보아야 된다는 그런 생각 자체가 없는 것 같았다. 심지어 그는 사형선고를 받은 후에도 '''상투어'''(Klischee)를 사용하여 자기 자신을 위로함으로써, 자신의 죽음마저 잊어버리고는 곧 의기양양해질 수 있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더구나 교수대 아래 서 있는 사람이 자신이 생전에 장례식장에서 들었던 것 외에 생각해 낼 수 없었다는 것은, 그리고 이러한 '고상한 말'이 자기 자신의 죽음이라는 현실을 완전히 모호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은, 엉뚱할 뿐만 아니라 단적으로 우습게 보이기까지 한다. 거기에는 어떠한 심오한 의미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지적으로 어리석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상투어가 아니고서는 단 한 구절도 말할 능력이 정말 없었을 뿐이다. 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speak)은 그의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think),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남들이 무슨 일을 겪는지 상상하길 꺼리는 단순한 그의 심리 앞에서는 그 어떠한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거짓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상투어(Klischee)와 관용어(Redensart)라는 튼튼한 벽 뒤에 숨어서 다른 사람들의 현존(the presence of others)에 대한 현실 자체(reality as such)를 깊게 생각해볼 의향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타인의 현실적인 입장에 대한 그의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는 그 자신을 그 시대의 가장 끔찍한 범죄자 중 한명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였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평범한' 것이고 심지어 우스꽝스런 것이라면, 만일 이 세상의 최고의 의지를 가지고서도 아이히만에게서 어떠한 극악무도하고 악마적인 심연을 끄집어내지 못한다면, 이는 그것이 일반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것과 아직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더구나 교수대 아래 서 있는 사람이 자신이 생전에 장례식장에서 들었던 것 외에 생각해 낼 수 없었다는 것은, 그리고 이러한 '고상한 말'이 자기 자신의 죽음이라는 현실을 완전히 모호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은 분명코 아주 일상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처럼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과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교훈이지 현상에 대한 설명도 아니고 그에 대한 이론도 아니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옮김, 한길사, 2006, p.391~392)] [* 자, 오해 중 하나는 이거예요. 사람들은 평범한 것은 아주 흔하다고도 생각해요. 하지만 내가 생각한 것은 ... 내가 말하려던 바는 그게 아니었어요. 나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아이히만이 있고, 우리 각자는 아이히만과 같은 측면을 갖고 있다는 말을 하려던 게 절대 아니에요. 내가 하려던 말은 오히려 그 반대예요! 나는 내가 누군가와 얘기할 때 그들이 내가 들어본 적도 없는, 전혀 흔하지 않은 말을 하는 모습을 완벽하게 상상할 수 있어요. 그리고 저는 "너무 평범해(banal)"라고 말해요. 아니면 "별로 안 좋아"라고 말하거나요. 그게 내가 말하려던 뜻이에요. 평범성(banality)은 정말로 간과할 수 없는 현상이었어요. 그 현상은 우리가 듣고 또 들었던, 솔직하게 말해서 믿기 힘든 상투어와 관용어들에서 저절로 모습을 드러냈어요. 평범성으로 뜻하려던 바를 설명해줄 이야기를 해드리죠. 예루살렘에서 나는 에른스트 윙거가 언젠가 들려주었지만 한동안 잊고 있던 이야기를 떠올렸어요. 전쟁 중에 에른스트 윙거는 포메라니아 아니면 메클렌부르크 ㅡ 아니, 포메라니아였다고 생각해요 ㅡ 소작농 몇 명을 우연히 만났어요. 그런데 그 소작농 중 한 명은 러시아인 전쟁 포로들을 포로수용소로부터 넘겨받아 자기 집에 거둔 사람이었어요. 당연히 그 포로들은 쫄쫄 굶고 있었죠. 러시아인 전쟁 포로들이 이 나라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는 당신도 알 것예요. 소작농은 윙거에게 말했어요. "글쎄, 그놈들은 인간 이하입디다. 소하고 다를 바가 없단 말이오! 그건 쉽게 알 수 있어요. 그놈들은 돼지 먹이를 먹어치우니까요." 윙거는 이 이야기에 이런 코멘트를 했어요. "독일인들은 때때로 악마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의 표현은 뭔가 '악마적'인 것을 뜻한 게 아니었어요. 봐요, 이 이야기에는 뭔가 터무니 없이 멍청한 게 있어요. 멍청한 이야기라는 말이에요. 그 소작농은 굶주린 사람은 누구나 그런 짓을 하리라는 걸 알지 못해요. 그 입장에서는 누구라도 그런 식으로 행동할 텐데요. 이 멍청함에는 정말로 터무니없는 게 있어요. ... 아이히만은 완벽하게 지적이었지만 이 측면에서는 멍청했어요. 너무도 터무니없이 멍청한 사람이었어요. 내가 평범성이라는 말로 뜻하려던 게 바로 그거예요. 그 사람들 행동에 심오한 의미는 하나도 없어요. 악마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고요! 남들이 무슨 일을 겪는지 상상하길 꺼리는 단순한 심리만 있을 뿐이예요. 그렇지 않아요?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의 말』 윤철희 옮김, 마음산책, 2016, p.82~85) (이 번역은 원래 독일어 인터뷰를 영문으로 번역하고 이를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것으로서 정확한 번역이 아니다. 어떤 맥락인지 참조만 할 것. 정확한 번역은 아래에 독일어 원문을 직역해 놓았다.)] [* 1960년 5월 29일부터 1961년 1월 17일까지 행해진 경찰심문 녹음의 독일어 번역본의 각 페이지마다 아이히만이 교정한 후 승인했는데, 이는 심리학자에게는 말 그대로 금광을 이룬다. 끔찍한 일이 엉뚱할 뿐만 아니라 단적으로 우스울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할 만큼 심리학자가 현명하다면 말이다. 이 희극의 일부분은 영어로 표현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 부분은 아이히만이 독일어를 위해 영웅적인 전투를 수행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은 이 싸움에서 항상 패배했다. 그가 사실은 관용적인 표현(Redensarten)이나 선전문구(Schagworte)를 사용하려고 의도했지만 그 대신 도처에서 '날개 달린 말들'(geflügelte Worte, 고전에서 인용한 유명한 구절을 사용하는 독일어의 일상어법)을 사용한 일은 우스꽝스러웠다. 재판장에 의해 독일어로 진행되던 자센 문서에 대한 심문에서 자신의 얘기를 더 활기 있게 하려는 자센의 노력에 저항한 사실을 가리키면서 'kontra geben'(이걸 주고 저걸 받다)이란 관용구를 사용한 것은 우스꽝스러웠다. 카드놀이 방법을 몰랐음이 분명한 랜다우 판사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아이히만은 다르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학교에 다닐 때부터 그를 분명히 괴롭혔을 결점(경미한 실어증 증세)을 희미하게 깨닥고 있던 그는 사과하면서, "관청용어(Amtssprache)만이 나의 언어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관청용어가 그의 언어가 된 것은 상투어가 아니고서는 단 한 구절도 말할 능력이 정말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분명 재판관들이 피고에게 그가 말한 모든 것이 '공허한 말'뿐이라고 드디어 말한 것은 옳았다. 다만 그들은 이 공허함이 가장된 것이며, 피고가 공허하지 않은 끔찍한 다른 생각들을 감추려고 그런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이 반박될 수 있는 것은, 아이히만은 기억력이 상당히 나쁨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중요한 일이나 사건에 대해 동일한 선전문구와 자기가 만든 상투어를 단어 하나 틀리지 않고 일관성 있게 반복한 점 때문이다. 아르헨티나나 예루살렘에서 회고록을 쓸 때나 검찰에게 또는 법정에서 말할 때 그의 말은 언제나 동일했고, 똑같은 단어로 표현되었다. 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speak)은 그의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think),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와는 어떠한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거짓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the words)과 다른 사람들의 현존(the presence of others)을 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reality as such)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옮김, 한길사, 2006, p.104~106)]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